더 러너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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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 러너웨이스는 1975년 결성되어 1979년 해체된 미국의 여성 록 밴드이다. 조앤 제트, 샌디 웨스트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셰리 커리, 리타 포드, 재키 폭스 등 여러 멤버가 참여했다. 1976년 데뷔 앨범 《The Runaways》를 시작으로 《Queens of Noise》, 《Waitin' for the Night》 등 여러 앨범을 발표했다. 펑크 록과 하드 록을 넘나드는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1977년 일본 투어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음악적 견해 차이와 금전 문제로 1979년 해체되었다. 2010년에는 밴드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 영화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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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러너웨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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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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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The Runaways |
결성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활동 기간 | 1975년 – 1979년 |
장르 | 하드 록 글램 록 펑크 록 록큰롤 |
레이블 | 머큐리 레코드 라이노 엔터테인먼트 체리 레드 레코드 레이븐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구성원 | |
이전 구성원 | 조앤 제트 샌디 웨스트 미키 (마이클) 스틸 페기 포스터 셰리 커리 리타 포드 재키 폭스 비키 블루 로리 매캘리스터 |
2. 역사
1975년 초, 록 프로듀서 킴 포울리는 조안 제트의 말처럼 "기타나 악기를 연주하는 어린 소녀는 전혀 없던" 시기에 여성 밴드를 결성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6]
포울리는 앨리스 쿠퍼를 위해 열린 파티에서 작사가 카리 크롬을 만나 여성 연주자를 찾도록 했다. 크롬은 조안 제트를 만나 포울리에게 데려갔고, 제트는 유클렐레로 더 스위트 앨범을 연주하며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통과, 기타를 악기로 선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울리는 레인보우 바 앤 그릴 주차장에서 드럼을 연주하기로 한 샌디 웨스트를 만났다. 포울리는 제트에게 웨스트의 집에서 연습을 시켰고, 음악 저널리스트 리치 요크에게 전화로 이들의 오디션을 들려주었다. 그 후 그는 두 개의 라디오 방송국에 추가 오디션을 광고했고, 이는 리드 보컬 겸 베이스 연주자인 미키 스틸(나중에 뱅글스 멤버)을 영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7][8]
더 러너웨이스는 1975년 8월에 결성되었다.[9] 포울리는 새로운 그룹인 러너웨이스를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에 대한 여성 밴드의 대답"이라고 선전했고,[10] 1975년 9월 킴 포울리 프로덕션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11] 제트, 웨스트, 스틸은 9월 28~29일에 위스키 어 고 고에서 포울리의 이전 컨셉 밴드인 할리우드 스타즈의 오프닝 공연으로 라이브 데뷔를 했다.[12][13]
10월 30일, 스틸은 창작적인 견해 차이로 탈퇴했다. 11월에는 베이시스트 페기 포스터와 리타 포드가 리드 기타리스트로 합류하여 제트가 리듬 기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포울리와 제트는 십대 나이트클럽 더 슈가 쉑에서 셰리 커리를 발견하고 그녀를 리드 보컬로 영입했다.[7][8] 2주 만에 포스터도 그룹을 떠났고, 포울리의 동료 로드니 빙겐하이머가 웨스트 할리우드 나이트클럽 스타우드 주차장에서 찾은 재키 폭스로 교체되었다.
1975년 12월 12일, 포노그램/머큐리 레코드의 서부 해안 A&R 디렉터 데니 로젠크란츠는 더 런어웨이즈와 계약을 맺었다.[8][15][16] 1976년 1월, 밴드는 데뷔 앨범 ''더 런어웨이즈''를 녹음해 3월에 머큐리를 통해 발매했다.[17] 이 앨범은 ''Cash Box'' 톱 앨범 차트에서 188위로 시작해 호평과 수많은 라디오 방송을 타며 7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6][18][19] 밴드는 Cheap Trick, 반 헤일런, 토킹 헤즈,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등 헤드라이닝 그룹의 지원을 받아 미국 투어를 돌았다.[20] 다큐멘터리 ''Edgeplay: A Film About the Runaways''(전 런어웨이즈 베이시스트 비키 블루 연출)에서는 각 멤버들이 자신의 음악적 우상을 본받았음을 보여주었다. 커리는 데이비드 보위, 제트는 수지 콰트로, 포드는 제프 백과 리치 블랙모어의 조합, 웨스트는 로저 테일러, 폭스는 진 시몬스를 따랐다.[21]
1976년 9월, ''피플'' 잡지에 더 런어웨이즈의 기사가 실렸다. 일주일 후, 포울리는 밴드와의 관계를 끊고 머큐리 레코드에 권리, 제목, 청구 및 상품 소유권을 포기했다.[22] 머큐리는 포울리의 밴드 지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다음 주에 그에게 돌려주었다.[16] 11월, 포울리와 밴드는 화해하고 스튜디오로 돌아가 후속 앨범 ''Queens of Noise''를 녹음했다.[23] 앨범은 1977년 1월 7일에 발매되었다.[24][25]
더 런어웨이즈는 ''Queens of Noise''를 지원하기 위해 월드 투어를 진행했다. 밴드는 라몬스, 더 데드 보이스(뉴욕시의 CBGB)와 같은 펑크 밴드뿐만 아니라 더 뎀드, 제너레이션 X, 섹스 피스톨스와 어울리면서 영국 펑크 신과도 동맹을 맺으며 빠르게 성장하는 펑크 록 운동에 합류했다.
1977년 여름, 에이전트 데이비드 리버트는 일본에서 매진된 공연을 확보했다. 그들은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한 팬들의 맹렬한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다. 제트는 나중에 대중 히스테리를 "그냥 비틀마니아 같았다"고 묘사했다.[26] 일본에서 더 런어웨이즈는 TV 스페셜, 수많은 텔레비전 출연, 골드를 기록한 앨범 ''Live in Japan''을 발매했다. 재키 폭스는 투어 중간에 밴드를 떠났고, 그룹이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베이시스트 비키 블루가 그를 대신했다.[27]
셰리 커리는 1977년 8월 9일 밴드를 떠났다. 같은 달, 포울리는 라라비 스튜디오에서 4인조 밴드와 조안 제트가 보컬을 맡은 더 런어웨이즈의 세 번째 LP ''Waitin' for the Night''를 녹음했다.[28][29] 앨범은 1977년 10월 17일에 발매되었으며, 포울리가 그룹과 함께 녹음한 마지막 앨범이었다.[30][31][32]
1977년, 금전 문제와 밴드 운영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더 런어웨이즈는 킴 포울리와 결별했다. 밴드는 곧 블론디와 수지 콰트로를 위해 일했던 토비 매미스를 고용했다. 또한 포울리와 헤어지면서 계약 관계에 있던 음반사 머큐리/폴리그램과도 결별했다. ''엣지플레이'' 다큐멘터리에서, 밴드 멤버들 (특히 폭스와 커리), 커리와 웨스트의 부모들은 포울리와 밴드를 돌보도록 배정된 다른 사람들이 학업 및 기타 관리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밴드를 통제하기 위해 분열과 정복 전술을 사용했으며, 밴드 멤버들을 언어적으로 조롱했다고 비난했다.
밴드는 씬 리지의 프로듀서 존 알콕과 파트너십을 맺고 마지막 앨범 ''And Now... The Runaways''를 녹음했다. 블루는 건강 문제로 밴드를 떠났고, 1978년 11월에 로리 맥앨리스터가 잠시 그를 대체했다. 맥앨리스터는 ''And Now... The Runaways''에서 키보드를 연주한 그녀의 이웃 듀안 히칭스를 통해 밴드에 소개되었다. 런어웨이즈에 합류하기 전, 맥앨리스터는 베이비 룰렛과 레이브 온스에서 활동했으며, 레이브 온스는 킴 포울리의 컴필레이션 LP ''Vampires From Outer Space''에 한 곡을 발표했다. 맥앨리스터는 1978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런어웨이즈의 마지막 공연에 출연했고, 1979년 1월에 밴드를 탈퇴했다.
밴드 멤버들 사이의 불화는 음악 스타일을 포함했다; 제트는 밴드가 펑크 록/글램 록으로 음악적 변화를 원했지만, 포드와 웨스트는 하드 록/헤비 메탈 음악을 계속 연주하고 싶어했다.[33] 어느 쪽도 상대방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4] 밴드는 1978년 새해 전야에 카우 팰리스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고, 1979년 4월에 공식적으로 해체했다.[35]
2. 1. 결성 (1975년)
1975년 말, 드러머 '''샌디 웨스트'''와 리듬 기타리스트 '''조앤 제트'''는 프로듀서 Kim Fowley|킴 포울리영어의 주선으로 만나 밴드 결성이 시작되었다.[6] 포울리는 웨스트와 제트에게 멤버를 찾아 주겠다고 제안했다.[7][8] 처음에는 싱어 겸 베이시스트 미키 스틸(후에 마이클 스틸이라는 이름으로 뱅글스에 가입)을 포함한 트리오로 활동하며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파티장과 클럽에서 연주했다.곧 리드 기타리스트 '''리타 포드'''가 합류했다. 그러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스틸이 탈퇴하고,[7][8] 베이시스트 페기 포스터가 잠시 자리를 채웠으나 한 달 만에 탈퇴했다. 이후 나이트클럽 "슈가 섀크"에서 노래하던 보컬리스트 '''셰리 커리'''를 영입하고,[7][8] Jackie Fox|재키 폭스영어가 베이스로 합류하며 데뷔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2. 2. 전성기 (1976년 ~ 1977년)

1976년, 더 런어웨이즈는 포노그램/머큐리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8] 데뷔 앨범 ''더 런어웨이즈''를 발매했다.[17] 이 앨범은 ''Cash Box'' 톱 앨범 차트에서 188위로 시작하여 호평과 함께 7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6]
밴드는 Cheap Trick, 반 헤일런, 토킹 헤즈,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등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 투어를 진행했다.[20] 각 멤버들은 데이비드 보위, 수지 콰트로, 리치 블랙모어, 제프 벡, 로저 테일러, 진 시몬스 등 유명 뮤지션을 모델로 삼아 개성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21]
1977년, 두 번째 앨범 ''Queens of Noise''를 발매하고 월드 투어를 진행했다.[24] 밴드는 빠르게 성장하는 펑크 록 운동에 합류하여, 라몬스, 더 데드 보이스, 더 뎀드, 제너레이션 X, 섹스 피스톨스 등과 같은 펑크 밴드들과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여름, 일본에서 매진 공연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조안 제트는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비틀마니아 같았다"고 회상했다.[26] 일본에서 TV 스페셜, 텔레비전 출연, ''Live in Japan'' 앨범 발매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본 투어 중 재키 폭스가 탈퇴하고, 비키 블루가 새 베이시스트로 합류했다.[27] 셰리 커리는 1977년 8월 9일에 밴드를 떠났고,[28] 이후 조안 제트가 리드 보컬을 맡으며 4인조로 재편, 세 번째 앨범 ''Waitin' for the Night''를 발매했다.[30]
2. 3. 분열과 해체 (1978년 ~ 1979년)
1978년, 더 런어웨이스는 금전 문제와 밴드 운영에 대한 의견 차이로 킴 포울리와 결별하고, 머큐리 레코드와의 계약도 해지했다.[33] 그 후 블론디와 수지 콰트로의 매니저였던 토비 매미스와 계약했다. 이 시기에 밴드는 록큰롤 라이프스타일을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씬 리지의 프로듀서였던 존 알콕과 함께 마지막 앨범 ''And Now... The Runaways''를 녹음했다.건강 문제로 비키 블루가 밴드를 떠났고, 1978년 11월에 로리 맥앨리스터가 잠시 베이시스트로 합류했다. 맥앨리스터는 ''And Now... The Runaways''에서 키보드를 연주한 듀안 히칭스를 통해 밴드에 소개되었다. 런어웨이즈에 합류하기 전, 맥앨리스터는 베이비 룰렛과 레이브 온스에서 활동했다. 맥앨리스터는 1978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런어웨이즈의 마지막 공연에 출연했고, 1979년 1월에 밴드를 탈퇴했다.
밴드 멤버들 사이에는 음악 스타일에 대한 불화가 있었다. 제트는 펑크 록/글램 록으로의 음악적 변화를 원했지만, 포드와 웨스트는 하드 록/헤비 메탈 음악을 계속 연주하고 싶어했다.[34] 어느 쪽도 상대방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밴드는 1978년 새해 전야에 카우 팰리스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고, 1979년 4월에 공식적으로 해체했다.[35]
2. 4. 재결합 시도와 무산
1990년대 초, 너바나가 막 인기를 얻으면서 런어웨이즈의 재결합은 시기상 좋지 않다는 판단에 무산되었다.[36] 2010년, 조앤 제트와 셰리 커리는 비디오 게임 ''기타 히어로: 워리어스 오브 록''에서 〈체리 밤〉을 다시 녹음했다.[36]리타 포드는 조앤 제트의 매니저 케니 라구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 재결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는 케니 라구나가 조앤 제트를 통제하며, 자신을 위협으로 여긴다고 주장했다.[37] 셰리 커리 또한 리타 포드와 케니 라구나의 갈등이 재결합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37]
3. 멤버
더 러너웨이스는 1975년 기타리스트 조안 제트와 드러머 샌디 웨스트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프로듀서 킴 포울리는 "기타나 악기를 연주하는 어린 소녀는 전혀 없던" 시기에 여성 밴드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고자 했다.[6] 포울리는 작사가 카리 크롬을 통해 조안 제트를 소개받았고, 제트는 유클렐레로 더 스위트의 앨범을 연주하며 오디션에 합격했다. 얼마 후 포울리는 레인보우 바 앤 그릴 주차장에서 샌디 웨스트를 만나 드럼 연주자로 영입했다.
초기에는 리드 보컬 겸 베이시스트로 미키 스틸이 합류했으나, 1975년 10월 음악적 견해 차이로 탈퇴했다.[7][8] 이후 베이시스트 페기 포스터와 리타 포드가 리드 기타리스트로 합류하며 조안 제트는 리듬 기타를 맡게 되었다. 1975년 11월, 셰리 커리가 십대 나이트클럽 더 슈가 쉑에서 발탁되어 리드 보컬로 영입되었고,[7][8] 곧이어 재키 폭스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하며 밴드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1977년 여름, 재키 폭스가 일본 투어 도중 밴드를 떠났고, 비키 블루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했다.[27] 같은 해 8월에는 셰리 커리가 밴드를 탈퇴하며, 조안 제트가 리드 보컬을 맡게 되었다.[28][29] 1978년 비키 블루가 건강 문제로 탈퇴하고 로리 맥앨리스터가 잠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으나, 1979년 1월 밴드를 떠났다.
결국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더 러너웨이스는 1979년 4월 공식 해체되었다.[35]
3. 1. 구성원
이미지 | 이름 | 활동 연도 | 악기 | 릴리스 기여 |
---|---|---|---|---|
![]() | 조안 제트 | 1975–1979 | 모든 릴리스 | |
샌디 웨스트 | 1975–1979 | [56] | ||
![]() | 미키 스틸 | 1975 | ||
-- | 리타 포드 | Born to be Bad (1991) 및 Cherokee Studios Demos (2024) 제외한 모든 릴리스 | ||
페기 포스터 | 1975 | 베이스 | ||
-- | 체리 커리 | 1975–1977 | 리드 보컬 | rowspan="2" | |
![]() | 재키 폭스 | rowspan="2" | | ||
비키 블루 | 1977–1978 | |||
로리 맥앨리스터 | 1978–1979 | 베이스 | And Now Tour 1978 (2019) |
기간 | 구성원 | 발매 음반 |
---|---|---|
1975년 7월 ~ 8월 | rowspan="2" | | |
1975년 8월 | ||
1975년 8월 ~ 10월 | ||
1975년 10월 | ||
1975년 11월 초 | rowspan="3" | | |
1975년 11월 | ||
1975년 12월 ~ 1976년 1월 | ||
1976년 2월 초 | ||
1976년 2월 ~ 10월 | ||
1976년 10월 | ||
1976년 11월 ~ 1977년 6월 | ||
1977년 6월 ~ 7월 | rowspan="2" | | |
1977년 7월 ~ 8월 | ||
1977년 8월 ~ 1978년 10월 | ||
1978년 10월 | ||
1978년 11월 ~ 1979년 1월 | ||
밴드는 1979년 4월 공식 해체 |
3. 2. 세션 멤버
사진 | 이름 | 활동 연도 | 악기 | 발매 기여 |
---|---|---|---|---|
-- | 마크 앤디스 | 1975 | 베이스 | Cherokee Studios Demos (2024) |
나이젤 해리슨 | 1976 | 베이스 | The Runaways (1976) | |
-- | 로드니 빙겐하이머 | 1976 | 오케스트레이션 | The Runaways (1976) |
듀안 히칭스 | 1978 | 키보드 | And Now... The Runaways (1978) |
4. 음악 스타일
더 러너웨이스는 하드 록, 글램 록, 펑크 록의 영향을 받은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무대 공연에서는 멤버 각자가 자신의 음악적 우상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셰리 커리는 데이비드 보위를, 조안 제트는 수지 콰트로를 따랐다.[21]
밴드는 빠르게 성장하는 펑크 록 운동에 합류하여 라몬스, 더 데드 보이스와 같은 뉴욕 펑크 밴드뿐만 아니라 더 뎀드, 제너레이션 X, 섹스 피스톨스와 같은 영국 펑크 밴드와도 교류했다.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는 결국 밴드 해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안 제트는 펑크 록과 글램 록으로의 변화를 원한 반면, 리타 포드와 샌디 웨스트는 하드 록/헤비 메탈 스타일을 고수하고자 했다.[33]
5. 디스코그래피
더 러너웨이스는 1976년 데뷔 음반 ''The Runaways''를 발매하고, 이듬해 ''Queens of Noise''를 발매했다.[17][24][25] 1977년에는 ''Waitin' for the Night''와 라이브 음반 ''Live in Japan''을 발매했다.[30] 1981년에는 ''Little Lost Girls''를 발매했다.
이 외에도 ''플레밍 스쿨걸스(Flaming Schoolgirls)''(1980), ''아이 러브 플레잉 위드 파이어(I Love Playin' with Fire)''(1982), ''더 베스트 오브 더 러너웨이스(The Best of the Runaways)''(1982), ''본 투 비 배드(Born to be Bad)''(1991), ''네온 엔젤스(Neon Angels)''(1992) , ''더 러너웨이스 피처링 조안 제트 앤 리타 포드(The Runaways featuring Joan Jett and Lita Ford)''(1997), ''20세기 마스터스 - 더 밀레니엄 컬렉션: 더 베스트 오브 더 러너웨이스(20th Century Masters - The Millennium Collection: The Best of the Runaways)''(2005), ''더 머큐리 앨범스 앤솔로지(The Mercury Albums Anthology)''(2010) 등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이 발매되었다.
5. 1. 스튜디오 음반
제목 | 앨범 정보 | 최고 차트 순위 | |||||
---|---|---|---|---|---|---|---|
미국[59] | 호주[68] | 캐나다[60] | 스웨덴[61] | ||||
The Runaways | 194 | 31 | — | — | |||
Queens of Noise | 172 | 36 | 83 | 28 | |||
'Waitin for the Night'' | — | — | — | 34 | |||
Little Lost Girls | — | — | — | — | |||
"—"는 해당 지역에서 차트 진입에 실패했거나 발매되지 않은 음반을 나타냅니다. |
5. 2. 라이브 음반
제목 | 앨범 정보 | 최고 순위 | |||||
---|---|---|---|---|---|---|---|
미국[59] | 스웨덴[61] | ||||||
라이브 인 재팬 | — | 33 | |||||
Live (Agora Ballroom, Cleveland - July 19, 1976) | — | — | |||||
Live in New York 1978 | — | — | |||||
And Now USA Tour 1978 | — | — | |||||
"—"는 해당 지역에서 차트 진입에 실패했거나 발매되지 않은 음반을 의미합니다. |
5. 3. 컴필레이션 음반
- ''플레밍 스쿨걸스(Flaming Schoolgirls)'' (1980)
- ''아이 러브 플레잉 위드 파이어(I Love Playin' with Fire)'' (1982)
- ''더 베스트 오브 더 러너웨이스(The Best of the Runaways)'' (1982)
- ''본 투 비 배드(Born to be Bad)'' (1991) ※1975년에 녹음된 공식 데뷔 전 음원
- ''네온 엔젤스(Neon Angels)'' (1992)
- ''더 러너웨이스 피처링 조안 제트 앤 리타 포드(The Runaways featuring Joan Jett and Lita Ford)'' (1997)
- ''20세기 마스터스 - 더 밀레니엄 컬렉션: 더 베스트 오브 더 러너웨이스(20th Century Masters - The Millennium Collection: The Best of the Runaways)'' (2005)
- ''더 머큐리 앨범스 앤솔로지(The Mercury Albums Anthology)'' (2010)
- ''체로키 스튜디오 데모스(Cherokee Studios Demos)'' (2024)
5. 4. 싱글
버블[67](플란데런)[69]